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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9-13 15:30
[Review]우리가 해야할 일은 진실을 밝히는 일, 레라미프로젝트[공연].
 글쓴이 : ȣ
조회 : 3,732  

1.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연극


공연 시작 전 영어로 된 뉴스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알아들을 수 있었던 단어는 게이, 매튜쉐퍼트, 폭력뿐이었다. 1998년, 내가 3살일 때 매튜쉐퍼트는 지금의 나보다 3살 어린 22살이었고, 동성애자란 이유로 폭행당하고 18시간 동안 울타리에 묶여 방치당했고 죽음에 이르렀다. 레라미 프로젝트는 그 실화를 토대로 만든 연극이었다.

2. 8명의 배우가 연기한 70여 명의 인물


극단'실한'의 배우 이준희, 김수민, 이 달, 조하나, 윤소희, 정현준, 임영우, 이승헌

공연이 시작되고 배우들이 인사를 했다. 배우들은 레라미 주민들을 인터뷰한 극단의 역할과, 그들이 인터뷰한 레라미 주민들을 번갈아 연기했다. 8명의 배우가 각각 다수의 인물을 연기했는데, 각각의 캐릭터를 잘 살려서 헷갈리지 않았다. 또 시작 전에 옷걸이에 많은 옷들이 걸려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들은 배우들이 1초 만에 입었다가 1초 만에 벗곤 하는 옷 들이었다. 수많은 옷들을 순식간에 입고 벗는 순간 그에 맞게 연기도 휙휙 변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다소 무거운 내용이었지만, 중간중간에 웃을 수 있는 포인트들이 있었고 그 웃음 포인트들은 보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쓴 티가 났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다양한 옷들

배우들이 마을 주민 연기를 할 때, 삑-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사람에게만 핀 조명이 들어온다. 삑-하는 소리가 들리고 다음 사람에게로 핀 조명이 비쳤을 때에도, 즉 자신에게 더 이상 빛이 들어오지 않는 순간에도 배우들은 조명 없이 각자의 역할을 계속 이어갔다. 공연은 쉬는 시간 없이 2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아무 곳에나 눈을 돌려도 최선을 다해 쉴 틈 없이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배우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을 통해 매튜가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고 그 억울한 죽음에 사람들이 어떠한 시선을 갖고 있는지 낱낱이 살필 수 있었다.

3. 조건하에 유지되는 평화


레라미 마을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입구에는 '혐오는 레라미의 가치가 아니다.' 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실제로 레라미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 평등과 평화로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불안한 평화로움에 불과했다. 레라미에 게이들이 많지만, 절대 자신의 성향을 밝히지 않는다.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남을 건들지 않으면 우리도 건들지 않는다. 게이를 인정한다." 언뜻 보기에 정당해 보이는 이 말속엔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고, 자신들의 기준에 올바르게 행동하는 게이를 인정한다는 우월주의를 엿볼 수 있었다.

표지판'HATE IS NOT LARAMIE VALUE'

4. 아는 것과 겪는 것의 차이


매튜가 폭행당한 날, 매튜는 자신이 자주 가던 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고 차를 타고 데려다준다는 가해자들을 따라나섰다가 폭행당하고 울타리에 묶인 채 18시간 방치 되었다. 방치된 매튜를 마을 주민이 발견했고 경찰에 신고했다. 서둘러 출동한 경찰은 피가 흐르다 굳어버려 열리지 않는 매튜의 입을 벌려 기도를 확보했고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매우 심각한 상태로 병원에 이송된 매튜는 결국엔 죽음에 이르렀다.

연극을 보기 전에 프리뷰를 작성했던 터라 사건에 대해서 이미 인지하고 있었고 혐오범죄임을 알고 있었으나, 내가 관람한 좌석은 B열이라 무대와 상당히 가까웠다. 알고 있는 것과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 달랐다. 범죄는 생각보다 너무나 가까이 있었으며 끔찍했다. 그럼에도 사형 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가해자들이 막상 내 앞에서 울고 무릎 꿇고 비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는 게 정말 당황스러웠다. 피해자의 가족들이 담담하게 써 내린 편지는 눈물을 왈칵 쏟게 했고 매튜가 끝내 죽었을 때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고, 이마가 지끈거리고 골이 울렸다. 지금 나는 운 좋게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너무나 만연한 범죄에 무뎌져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5. 우리가 해야할 일


매튜의 억울한 죽음을 시위하기 위해 촛불을 들고 약 500명이 레라미에 모였지만, 몇몇의 말은 어쩐지 본질과 멀게만 느껴졌다. "레라미가 그런 도시가 아니란 걸 보여줍시다!"당차게 외치는 사람 뒤에 촛불을 들고 나란히 줄을 서서 따르는 사람들에 찜찜함을 느꼈다. 또 그 시위를 방해하기 위해 확성기와 같은 목소리로 "동성애는 악"이라며 소리를 우악스럽게 질러대는 목사는 사랑을 평생 가져가야 할 숙제로 삼는 지도자 답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죽었을 때는 신문 기사에 조그맣게 나더니, 동성애자란 이유로 이렇게 세상이 떠들썩한 건 불공평하죠"라고 핀트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비난의 화살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사실상 그 사람이 비난하고 분노해야 할 대상은 진실을 은폐하려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어쩐지 이 모습은 어떤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마다 많이 보던 모습이라 답답함과 울화가 치밀었다. 비난의 화살이 도대체 왜 피해자에게로 향하는 걸까. 우리가 이 같은 일을 겪었을 때 그리고 겪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진실을 밝히고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도록 그들의 처벌과 제도 개선에 힘쓰는 일이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분류된다는 점에서, 지구에서 가장 진화한 것으로 분류된다는 점에서 약자가 혐오의 대상이 되고 범죄의 대상이 될까 두려움에 떨면서 살아야 하는 약육강식의 세상을 살게 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요지경이고 시대의 흐름은 언제든지 바뀌고 어떤 날에는 눈부신 햇살이 비치기도 하지만 어떤 날에는 비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치고 거스를 수 없는 대자연의 운명에 따라 언제든지 재해를 당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제든지 누구든지 간에 항상 약자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매튜가 울타리에 묶여 있던 곳.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그곳엔 매튜의 친구가 있었다. 바람이 있었고, 나무가 있었다. 밤에는 마을의 집집마다 불빛들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 18시간 매튜는 그것을 바라봤겠구나. 어떤 마음으로 바라봤을까.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동성애자인 죄 없는 당신을 탓했을까.

아버지가 가해자를 사형하길 원치 않음을 밝히며 가해자에게 "당신이 크리스마스에 촛불을 부는 즐거운 순간 우리 매튜를 떠올려주길, 내 곁엔 같이 축하할 아들이 없음을 죽을 때까지 기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요."라고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